투자 명인들 중 한 명인 윌리엄 오닐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진술한 인물이 '제시 리버모어'다.
명저 '최고의 주식 최적의 타이밍'을 읽고 난 후,
이 제시 리버모어의 '주식 매매하는 법'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윌리엄 오닐이라는 인물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기 때문이다.
제1장에 나오는 제시 리버모어의 생애를 보고 난 후,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안쓰럽다는 느낌이 동시에 든다.
4번의 파산과 엄청난 부를 다시 축적해 내는 그 과정이 정말 대단하지만,
우울증으로 인해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그가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이 너무 안쓰럽게 느껴진다.
아마 여러 번의 심리적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그 압박감으로 인해 마음의 병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제시 리버모어의 삶에서 배울 점은
치열하게 매매일지를 작성하며 자신의 실수를 분석하고 반성한 점,
스스로의 사고를 통해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
기회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는 점,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고로움도 기꺼이 감수했다는 점,
전체 주식시장과 현재의 주도업종 내부 흐름과의 관계를 관찰함으로써
향후 전체 주식시장의 방향을 가늠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1. 월스트리트 지식의 핵심, 제시 리버모어의 생애
1) 호가판주사
- 초등학교 시절 리버모어는 숫자에 대해 탁월한 재능을 보여 3년 과정의 산수를 1년 만에 마치기도 했다.
- 초등학교를 퇴학한 그는 뉴잉글랜드의 척박한 토양을 일구며 농사일을 거들었지만, 허약했던 탓에 자리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으며, 그 기간 동안 비록 몇 권에 지나지 않는 책이지만 반복적으로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891년 14살이 되자, 보스턴으로 가출을 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구한 직장이 지난 2000년 스위스 유니언 은행에 인수합병 된 증권회사 페인 웨버의 '호가판주사'였다.
- 당시 증권회사 객장에는 증권시세표시기(Ticker)를 통해 들어오는 주가를 고객들이 볼 수 있도록 기록하는 커다란 칠판이 있었는데, 호가판주사로서 그가 담당한 일은 증권시세표시기 옆의 동료 소년들이나 고객들이 불러주는 주가를 그 칠판에 기록하는 것이었다.
- 리버모어는 수첩을 마련했고, 주식시장이 열리고 있는 장중에는 당일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주식의 주가를 기억했다가 틈틈이 그 수첩에 기록하곤 했다.
- 밤 늦게까지 그 숫자들의 움직임들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 주가의 움직임에서 어떤 패턴을 찾아내려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자신의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수천 수만 번에 걸친 반복 학습으로 이어졌다.
2) 최초의 거래와 꼬마 노름꾼의 탄생
- 15세가 된 제시리버모어는 동료소년의 비밀정보를 듣고 해당 종목의 주가 패턴을 확인한 후, 동료 소년과 한께 공동으로 총 5달러의 지분을 출자하여 그 주식을 매수했다. 며칠 뒤 주가가 상승하고, 매도하여 차익을 실현했는데, 벌어들인 돈은 자신의 지분 50%에 해당하는 3.2달러였다. 아마도 그 성공으로 인해 이 15세 소년은 주식에 더욱 매료되었을 것이다.
- 그들이 성공적이 합작 투자를 했던 곳은 증권회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소위 사설증권회사(Bucket Shop)라 불리는 곳이었다.
- 첫 거래에서 수익을 얻은 15세 소년은 이후 혼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거래하게 되는데, 사설증권회사에서는 '10% 증거금 규칙'이 적용되었다. 이는 고객이 지니고 있는 현금의 열 배까지 매매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레버리지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 '10% 증거금제도'로 인해 주식 매수 후 가격이 10%만 하락하면 소위 깡통을 차게 되고, 공매도했을 경우 가격이 10% 상승하면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사설 증권회사에서는 실제 거래소를 통해 주문을 체결시키지 않았으므로, 만일 고객이 반대매매(Margin Call)를 당하게 되면, 그 돈은 고스란히 사설증권회사의 수입이 되는 것이다.
- 이 당시 리버모어가 배웠던 것은 투자자금 관리의 중요성, 즉 손절매의 중요성이었다. 평생 동안 주식과 상품을 거래하면서 명심하고 있었던 것이 '10% 손절매 원칙'이었다.
- 리버모어는 주식시장보다는 가격 자체의 등락을 예측하고 이로부터 수익을 얻고자 했으므로, 주가의 상승과 하락 모두에 관심을 가졌으며, 양 방향 모두에서 거래하곤 했었다. 강세론자와 약세론자의 입장 모두에서 거래했던 것이다.
- 16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급료로 받는 금액보다 거래를 통해 얻는 수익이 더 많아졌고, 총수익이 1,000달러가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투자자가 되기로 뜻을 정했다.
3) 매매를 금지 당하다
- 리버모어는 적극적인 매매 스타일과 상대적으로 엄청난 거래 규모로 인해 '꼬마 노름꾼'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 그는 너무나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사설증권회사들의 입장에서 그는 너무나도 위험부담이 큰 존재였다. 그래서 결국 사설증권회사들은 리버모어와의 거래를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마침내 그는 모든 사설증권회사의 출입을 금지당하기에 이르게 된다.
- 제시 리버모어는 자신의 거래규모와는 상관없이 사설증권회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대로 거래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뉴욕으로 진출했고, 미국 증권거래소의 회원 증권회사에서 2,500달러를 자본으로 거래를 시작했다.
- 그는 자신의 실패에서 항상 배우고자 했으므로, 거래내역을 통해 항상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분석하고 반성했다. 이러한 방법은 그가 주식시장과 트레이딩에 대해 배우는 최고의 수단으로 판명되었다.
- 자신의 매매에 대한 이 최초의 분석 기간 동안 자신이 손실을 입은 원인이 '인내심의 부족' 때문이며, 또한 주가의 사소한 등락까지 모두 이용해 돈을 벌려고 했기 때문이고, 항상 끊임없이 거래했기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4) 첫 번째 파산
- 뉴욕에 도착할 당시 그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지만, 뉴욕에서 거래한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모든 돈을 다 잃어야만 했다.
- 그가 사설증권회사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이 뉴욕에서 거래할 때는 '양날의 칼'이 되었다. 사설증권회사에서 거래할 때에는 증권시세표시기에 나타나는 현재가 내지는 직후의 체결가로 매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증권시세표시기에 나타나는 체결가는 실제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가격과는 차이가 있었는데, 이는 거래소에서 거래가 체결된 후 전신망을 통해 거래소 외부로 송신되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 파산한 그는 자신이 거래소를 통해 주문할 경우에 부딪히게 되는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다시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거래증권회사의 사주에게서 500달러를 빌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설증권회사에서 거래를 하게 된다.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거래한 지 단 이틀 만에 2,800달러를 번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빚을 모두 상환한다.
-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계좌의 규모는 증가하지 않았다. 게임의 룰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사설증권회사에서 거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가명을 사용해 그곳에서 거래하게 되었고, 계좌 규모를 10,000달러까지 키우는 데 성공한다.
- 하지만 곧바로 정체가 탄로 나는 바람에, 사설증권회사에서 거래하는 것을 영원히 금지당한다.
5) 상승장에서의 두 번째 파산
- 리버모어가 24살이 되더 1901년 주식시장은 활황장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노던퍼시픽 철도회사의 주식을 매수하여 10,000달러의 자산을 50,000달러까지 키우기도 했다.
- 1901년 봄 무렵, 묻지마 투자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광란의 장세가 지속될 수 없다고 판단한 리버모어는 시장이 단기적으로 급락하여 조정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공매도 거래에 임했다. 시장은 실제로 단기간에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급락에 따른 대기 매수세의 유입으로 급반등 하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리버모어는 또 한 번 파산을 경험했다.
- 파산한 이유는 대량 거래의 일시적 유입으로 인해 증권시세표시기에 나타난 체결가가 실제 거래소에서 거래되고 있는 가격보다 30분에서 1시간가량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즉 공매도주문은 실제도 훨씬 더 낮은 가격에 체결되었고, 급락한 가격에서 공매도 포지션의 청산을 위해 낸 매수주문은 훨씬 더 높은 가격에 체결되었던 것이다.
6) 시간 요소의 발견
- 고향으로 낙향한 그는 새로운 유형의 유사 사설증권회사와 거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고, 1년간의 거래를 통해 1902년 무렵에는 다시 이전 수준으로 계좌를 회복할 수 있었다.
- 그는 두 번째 파산을 통해 '시간요소(Time element)'의 중요성을 배웠는데, 시간요소란 주식투자를 할 경우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며, 이렇게 인내심을 지니고 기다린다면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 사설증권회사의 경우에는 그 속성이 도박장과 매우 유사했으며,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만 했고, 그것이 통했었다. 그러나 뉴욕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고, 좀 더 긴 시간주기를 고려해야만 했으며, 이것은 지연된 시세로 인해 얻은 교훈이었다.
- 그는 시간요소를 성공적으로 트레이딩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내심을 꼽았고, 이것은 시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 리버모어는 '시장을 예상하려는 것은 도박'이라는 정의를 내렸고, 투기거래를 '인내심을 가지고 시장 상황이 투기거래를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낼 때에만 그 신호에 대응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 이런 정의를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트레이더들이 있다. 이들 중 거대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운용해주며 펀드매니저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 명의의 자산운용회사를 설립하여 운용하는 이들도 있으며, 또한 순수한 개인투자자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그들을 추세매매자라 부르며, 국내에 단편적으로나마 알려져 있는 인물들로는 존 W. 헨리, 리차드 데니스, 에드 세이코타 등이 있다.
7) 비밀정보와 주식투자
- 리버모어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견해(소위 비밀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여전히 빈번하게 거래를 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일찍 차익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이 벌 수 있었으며 또한 벌어야만 했던 수익만큼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는 전체 시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시장을 바라볼 때 시장의 움직임과 이것이 개별 종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배우고 이해해야만 했고, 이를 통해 그는 시장의 현재 국면을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다.
- 그는 주식시장의 투자자들을 세 부류로 분류했다.
· 첫 번째 부류는 초보자들로, 이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당연히 잃게되어 있었으므로, '호구'라 불렀다. |
· 두 번째 부류는 어느 정도의 거래 경험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들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는 더 높은 수준의 호구들이 제시하는 견해를 공부하는 사람들인, '준 호구'다. |
· 마지막 부류는 앞의 두 부류와는 차별되며, 타인에게 자발적으로 조언하는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견해를 무시하지도 않는 사람들(전문가)이다. 이런 사람들은 시장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으며, 빈번하게 거래하지도 않는다. 기회가 왔을 때 인내심을 가지고 큰 돈을 번다. |
- 당시까지 그는 '준 호구'에 해당하고 있었지만, 지속적인 연구와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으며, 겸손하고 유연한 사고를 지니고, 자신이 판단을 내리고 자신을 신뢰할 줄 아는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8) 발전되는 매매기법
- 리버모어의 투자전략 중 하나는 모든 포지션을 정리하고 나서 주식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강제적으로 '쉬는 투자'를 할 수 있었다.
- 어느 날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의 주식을 공매도하게 되었는데,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발생으로 인해 이 판단은 적절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지진 발생소식이 전해진 뒤에도 주식시장은 며칠 동안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는데, 이는 강세장이 진행됨에 따라 악재가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세장에서는 악재가 무시되고, 약세장에서는 호재가 무시된다) 이 거래를 통해 그는 250,000달러를 벌어들였다.
- 이 당시 그가 사용했던 매매기법은 시험전략과 피라미딩 전략이었다. 이 기법들을 사용함으로써 '손실은 짧게, 수익은 길게' 가져갈 수 있었다. 이 전략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분할매수 전략과 손절매 원칙을 혼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누구나 옳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드물며, 그 또한 자신의 원칙을 지켰을 때에야 비로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그는 관찰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여 추세가 형성되는 시점에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비록 비밀정보로 인해 손실을 입게 되었지만, 신속하고 유연한 사고로 손실을 수익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과거의 잘못된 매매습관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9) 큰손이 되다
- 충분한 자본과 풍부한 경험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감에 충만해 있던 29세의 리버모어는 관심의 초점을 경제의 전체적인 상황에 맞추고 있었다.
- 1906년 시장은 강세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리버모어는 그해 하반기부터 매도자의 입장으로 주식시장에서 거래를 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손실을 입어야만 했고, 반복적인 손절매를 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기술적 분석을 사용하여 매매의 시기를 결정해야 했지만, 시장의 수급 상황은 무시한 채 경제 전반적인 상황만을 고려했던 것이 문제였다.
- 그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시장이 하락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는데, 바로 이점이 그가 '시간요소'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할 때 '완벽한 심리적 시간'이라고 말한 것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 1907년 투매장세에서 J.P. 모건은 은행장들로 하여금 준비금을 증시에 투입하게 함으로써 시장을 안정시켰다. 그 후 제시 리버모어에게 주식을 공매도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했다. 모건의 요청을 받은 제시 리버모어는 자신의 공매도 물량을 되사들였고, 단 하루 만에 3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으며, 시장은 마침내 반등하기 시작했다. 30세였던 그는 '월스트리트의 큰 곰'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큰손으로 부각되게 되었다.
10) 시카고 선물 거래소
- 선도계약은 선물계약과는 달리 정형화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시카고 상인들에 의해 차츰 제도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후 82명의 시카고 상인들이 모여 만든 거래소가 오늘날의 시카고 선물거래소의 시초가 되었다.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초창기에는 밀, 옥수수, 귀리, 대두, 면화 등의 곡물이 주요 거래대상 상품이었다.
- 선물거래가 오늘날과 같이 큰 발전을 하게 된 것은 1970년대의 금리불안을 겪으면서 효과적인 헷징수단으로써 금리선물계약이 도입되었고, 1980년대는 주가지수선물이 도입되면서부터였다.
- 리버모어는 30세가 되던 1907년 이전부터 상품선물을 거래했고,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이던 기간 중에도 상품선물을 거래하고 있었다. 이 당시 그가 이룬 성공의 규모는 직접 요트를 구입했다는 점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 그는 면화 선물을 거래하게 되었는데, 이후 면화의 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이익 규모도 증가했지만, 시장 규모에 비해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물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리버모어가 면화선물을 매집했다는 소문을 흘렸고, 그 소식이 언론에 보도됨에 따라 가격이 급등했다. 시세가 급등하며 거래가 폭증할 때, 리버모어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포지션에 무사히 빠져나오게 된다. 이 거래를 통해 그는 '면화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 그는 경험을 통해 시세의 최고점과 최저점에 거래하려는 것이 무모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그는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도움이 되는 것들 중 하나가 시세의 처음 또는 마지막 1/8을 잡으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1) 매력적인 인물의 위험성
- 리버모어는 주식시장이 수많은 시장참여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인간의 심리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며, 주식시장에 과거와 유사한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본성이 잘 바뀌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 바 있다.
- 그 당시 리버모어는 인간의 감정 중에서 탐욕, 공포, 희망 등은 극복할 수 있었지만, 매력적인 인물이 지니는 인간적인 영향력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면화선물 시장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던 인물과 함께 일함으로써, 혼자 거래한다는 원칙을 깨뜨리게 되었고, 동시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여러 가지의 투자원칙을 위반하고 만다. 이때 다시 한번 파산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파산으로 인해 10만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고, 그 원인이 자만심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주식시장은 기나긴 횡보장을 나타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절치부심 노력했음에도 재기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 그가 부채로 인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거래하지 말아야 할 시점에서 거래를 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1914년 법원에 공식적으로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 이 당시 미국 금융시장에 몇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 1911년 사기행위에 대한 규정과 증권의 판매자에 대한 자격 조항을 담은 'Blue Sky'법이 캔자스주에서 최초로 발효
· 1913년 은행업의 신용을 높이기 위해 연방준비법 제정, 이에 따라 연방준비제도가 시행
12) 전쟁과 주식시장
-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피살사건을 계기로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 뉴욕증권거래소는 약 4개월 반 동안 폐쇄되었다.
- 1915년 파산한 상태인 38세의 리버모어는 이전에 배신감을 느끼게 했던 인물을 찾아갔다. 그 인물에게서 500주의 주식을 언제든지 자신의 증권회사를 통해 매수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시험전략과 피라미딩 전략을 구사하였고, 며칠 뒤 그는 50,000달러의 차익을 실현하게 된다. 이후 주식시장 강세로 그의 계좌 규모도 급속도로 증가하게 됐다.
- 하지만 1915년 독일이 어뢰로 영국의 호화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사전 경고 없이 격침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강력하게 항의하고, 여론도 반독일로 굳게 된다. 그 후 독일과 미국의 잠수함전이 격렬해졌고, 1917년 미국은 독일에 대항하여 세계 대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리버모어는 손실을 입어야만 했다. 한때 500,000달러까지 증가했었던 그의 계좌는 연말에 150,000달러로 마감했다.
- 1916년 리버모어는 시장 선도주를 적극적으로 매수함으로써 수익을 올렸다. 선도주의 흐름이 변화되는 것을 감지한 연말부터는 자신의 매매원칙에 따라 서서히 주식을 공매도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3백만 달러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 그는 선도주를 매매했음은 물론이고, 선도주의 움직임을 통해 시장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자신이 최소저항선에 따라 매매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1917년 리버모어는 불혹의 나이였고, 세계 1차 대전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게 된다. 독일이 일방적으로 무제한잠수함전을 선언했고, 그 후 미국은 공식적으로 세계 제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때 리버모어는 주식과 밀선물을 공매도해서 수익을 얻었고, 면화선물에서는 손실을 입게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100만 달러를 상회하는 차익을 실현하게 된다. 그는 윌슨대통령의 노력이 결실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시장도 그가 생각한 것과 동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 리버모어는 뉴욕으로 돌아와 변제 의무가 없는 100만 달러 이상의 채무를 모두 변제했다.
13) 또 하나의 교훈, 정부의 정책에 맞서지 말라
- 1917년 연말부터 리버모어는 뉴욕커피거래소를 통해 커피선물을 매수한다. 모든 상품의 물가가 전쟁이 발생하기 전보다 100~400%까지 상승했지만, 커피가격만 전쟁 발생 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데 착안한 거래였다.
- 하지만 당시는 전시였으므로, 정부당국에서는 생필품을 매집하는 행위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전시물가고정위원회에서는 커피 가격상한선을 고정시킨 후 기존의 모든 포지션을 청산할 기간을 정한 후에 커피거래소의 영업을 상당기간 정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리버모어는 포지션을 강제로 청산해야만 했다.
- 정부의 정책에 맞서는 것만큼이나 정부의 정책을 따르지 않는 것도 시장에서 수익을 얻는 것에는 보탬이 되지 않는다. 정부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미국은 채무국이었으나, 이 전쟁을 계기로 채권국으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도 현격하게 높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8년 월스트리트는 런던을 앞서 나가게 되고, 이후 세계 금융시장에서 월스트리트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14) 주식투자 이론의 완성기
-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는 그를 위한 시기로, 이전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그는 트레이더로서 완성되고 있었다.
- 리버모어는 투자자들이 경계해야 할 감정으로 무지, 공포, 희망, 탐욕을 들었다. 투자자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막연히 기대하기 때문에 탐욕스러워진다'는 것이다.
- 인류는 '희망'이라는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커다란 진보를 이룰 수 있었고,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긍정적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의 희망은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왜곡시키는 역할을 한다.
- 리버모어는 성공적인 투자자가 지니는 네 가지의 정신적인 특성을 관찰력, 기억력, 수학적 계산능력, 경험으로 규정했다.
- 이 당시 리버모어는 주식시장에서 선도주를 파악해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 배우고, 또 실제 매매에서 활용하기도 했다. 새로운 강세장에 진입할 때마다 현재의 선도주는 과거의 선도주와 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도주들이 다른 주식들과 차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는 이 주식들이 벌어들이게 될 향후 수익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선도주를 매매해야 하는 이유는 수익의 극대화뿐만 아니라 투자 종목을 작은 수로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선택과 집중이 가능해진다. 리버모어는 소수의 종목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자신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둘째는 소수의 종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시기에 관찰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는 동일한 산업 내에 속한 주식들이 유사한 패턴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만일 동일 산업에 속한 주식들이 동일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해당 업종에 대한 경제적 환경이 변화되었거나 변화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며, 주가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는 해당 업종에 속한 주식 전체가 상승하고 있는데, 특정한 주식만 하락하거나 뒤쳐진다면, 그것은 개별 주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비록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회사의 내부자 등은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리버모어의 동일 산업 내의 주식들을 연관시키는 매매기법은 오늘날 '짝짓기매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1907년 상품선물시장에서 옥수수선물과 귀리선물의 짝짓기매매로 성공적인 거래를 할 수 있었다.
- 1910년대 후반~1920년대를 거치면서 그는 주식시장에서 유사한 사업을 영위하는 회사들의 주가가 나타내는 유사한 움직임에 대해 연구했고, 이를 발전시켜 자신의 비법이라고 밝힌 '리버모어의 시장핵심'이라는 기법을 직접 개발하고 투자에 활용했다.
16) 요트를 타고 출퇴근하다
- 1919년 리버모어는 롱아일랜드 지역으로 이사했는데, 이사한 곳의 부지는 1만6000평이었고, 건축한 지 100년 이상 지난 낡은 대저택이 있었다. 이 대저택은 약 2년간에 걸쳐 수리를 한 뒤 '에버모어'라 불리게 된다.
- 리버모어는 대저택의 커다란 정원에 딸린 호수에 요트(길이 91m)를 정박시켜 놓고, 요트를 이용해 월스트리트로 출퇴근했다고 한다.
- 새로운 강세장으로 들어선 1923년, 리버모어는 헥셔빌딩의 팬트하우스로 개인사무실을 이전한다. 월스트리트에서 떨어진 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던 것은 주식시장의 '비밀정보'에서 멀어지기 위한 목적이었고, 자신의 매매를 타인이 모르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매매에 대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여러 증권회사를 통해 가명으로 주문을 내기까지 했다. 이러한 비밀주의로 인해 그에게 '월스트리트의 늑대'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 리버모어는 주식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았고, 자신의 일과 개인적인 생활을 엄격히 분리시켰다. 그는 항상 10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었으며, 늦어도 아침 6시 이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서 하루를 계획했다.
- 그는 여러 번의 파산을 경험하는 동안 주식시장에서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고로움도 기꺼이 감수하려 했다.
- 리버모어의 책상에는 세 대의 전화기가 있었는데, 런던과 파리 그리고 시카고 선물거래소와 연결된 직통 전화였다. 또한 그의 옆에는 항상 증권시세표시기가 있었다. 자신 소유 별장은 물론이고 휴양지 호텔방에도 증권시세표시기를 설치함으로써 항상 시장의 움직임을 관찰하려 했었다.
- 그는 시간요소를 설명할 때, '정직과 성실로 자신의 매매일지를 작성하며, 노력을 기여 스스로의 사고를 통해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투자자가 거둘 수 있는 성공은 정비례한다고 강조했다.
17) 시장의 정점에 서서
- 1923년 시작된 강세장은 그 후 6년 동안 이어졌다. 문제는 주식시장의 상승세가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이어졌다는 데 있었다.
- 시장을 세밀하게 관찰하던 투자자들이라면 주식시장이 붕괴되기 한 달여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여러 가지 징후를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우지수는 이미 고점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선도주들의 주가는 더 이상 신고가를 경신하지 못한 채 정체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 이미 시중에는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자금이 사라진 상태였고, '스마트머니'들은 이미 시장을 떠나고 있었다. 이윽고 '검은 목요일(10월 24일 1,300만주 거래량 기록하며 폭락)'이 나타나고, 5일 뒤 '검은 화요일(10월 29일 거래량 1,600만주 기록하며 지수 11% 하락)'이라 불리는 주식시장의 붕괴가 나타난다.
- 1929년 10월 24일 주가 대폭락을 기점으로 대공황이라 불리는 전형적인 세계 공황으로 이어졌다. 1933년 연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 폐해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
- 리버모어는 이미 1920년대에 전체 주식시장과 현재의 주도업종 내부 흐름과의 관계를 관찰함으로써 향후 전체 주식시장의 방향을 가늠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매매규모가 컸기 때문에 주식시장이 상승하며 거래가 활발할 때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물량을 처분하고자 했다. 그는 시세의 천정과 바닥을 알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는 물량을 기꺼이 넘겨주었고, 공포로 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투매할 때 그 물량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 1929년의 시장상황은 한 마디로 '버블'이었다. 역사적으로 17세기 튤립 투기, 19세기 식민지 금광개발권을 가진 기업에 대한 투기, 19세기 철도주식 버블, 1929년 대공황,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일본 증시 붕괴와 1990년대 부동산 버블붕괴, 2000년 닷컴버블 붕괴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버블의 공통적인 특징은 부채를 이용한 '차입'으로 인해 그 피해 규모가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돈만으로 투자를 할 때에는 아직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단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용으로 '부채'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 단기간에 훨씬 큰 수익을 얻게 되면, 자신을 통제하고 있던 이성은 사라져 버린다. 운 좋게 몇 번의 수익을 얻는다 하더라도 추세가 바뀌면 단 한 번의 실패로 인해 그동안 모아 두었던 수익은 물론, 원금마저 손실을 입게 된다.
18) 월스트리트의 지식이 되다
- 1929년 주식시장 붕괴 후, 1933년 최초의 증권거래법이 제정되고, 1934년 증권거래법의 개정과 함께 증권관리위원회가 설립되며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졌다.
-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되었을 때 제시 리버모어는 시장에 정점에 서있었는데, 언론에는 그에 관한 추측성 보도가 실렸으며, 그는 협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 무렵 엄청난 돈을 벌기는 했지만,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항상 이성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았다. 세 번의 결혼을 했는데, 그중 행복했던 시기는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그가 주식시장에서 이룬 성공과 인간적 행복은 결코 비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 그가 적극적으로 거래했던 것은 1932년까지이며, 그 후 거래에서 개인적 불행의 영향으로 매매에 난조를 보이다가 결국 1934년에 다시 한번 파산한다. 1929년에 이룬 큰 성공이 불과 5년 만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17년 파산을 대비해 마련해 두었던 신탁계정을 이용함으로써 물질적으로는 비참한 삶을 살지는 않아도 됐다.
- 그의 우울증은 차도가 없이 더욱 악화되었고, 1940년 뉴욕의 쉐리 네더랜드 호텔 지하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 제시 리버모어는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이자 주식시장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남긴 위대한 트레이더였지만, 개인적인 불행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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